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미국조차도 엄청난 비용과 첨단기술을 이용한 과학수사, 그리고 다양한 전문가를 활용한 최신수사기법, 그리고 수많은 경찰병력을 투입되어도 아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이 있다. 잔혹한 사건을 보며 꼭 범인이 붙잡혀 사회정의를 실현해야하는게 마땅하지만 안타깝게 해결못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미제사건들이 있는데, 엄청난 수사인력을 투입했음에도 해결하지 못한 3대 미제 사건들을 한번 알아보자.


화성 연쇄 살인 사건



1986.09.19. 경기도 화성.
71세의 노인이 시체가 시작으로 일어난 가장 유명한 살인사건.


화성연쇄살인사건(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이 시작되었다. 경기도 화성 태안일대에서 4년 7개월동안 약 10여 차례의 부녀자 * 및 연쇄살인.


사건당시 피해자들을 관찰하면 스타킹, 양말 같은 피해자의 옷가지로 목이 졸린채 살해되었다. 거기다 음부에는 복숭아 조각등이 나와서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경찰병력만 연인원 205만명. 용의자와 참고인을 다 합치면 21,280명. 지문대조 40.116명, 유전자 dna 분석 507명, 모발감정 180명


이처럼 수많은 경찰병력을 투입해서 얻어온 수사기록은 캐비닛 5개 분량이라고 한다. 하지만 공소시효 15년이 끝나게 되었고 결국에는 2006년 9월 19일 영구미제사건으로 남게되었다. 지금까지도 이 범행이 담독범인지 아닌지 조차도 밝히지 못했으며, 7,9,10차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3명의 용의자도 사고로 또는 자의로 목숨을 끊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다.


범인의 인상창의 조차도 알게 되었던 것도 유일한 목격자가 7차 사건때에서야 나왔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해결된 사건은 오직 8차 살인사건이며, 이때는 현장에 남아있던 모발과 범인의 모발이 일치하여 해결된 경우이다.
하지만 다른 살인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걸로 판명되어, 결국 진짜 범인을 잡지를 못했다.


아래는 사건의 주요 특징과 범인의 몽타주 및 인상창의 이다.


사건의 주요특징



피해자는 모두 여성

피해자의 연령층은 다양했다. 1차(71세), 7차(52세), 10차(69세)

피해자의 음부는 크게 훼손되어져 있었다. (4,6,7,9차)

피해자는 대부분 교살(목을 조르게)되어 살해되었다.

사건현장이나 피해자의 음부 안에는 범인으로 추정되는 정액 또는 머리카락이나, 담배꽁초 등이 발견되었다.

한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국부에 복숭아 조각이 9개가 나왔고, 가슴에 19차례의 칼로 난도질되어 졌다고 한다.

범인의 몽타주 및 인상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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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당시의 나이는 20대 중반. 하지만 현재는 40대 중반이다.
또한 신장은 165~170cm정도이며, 호리호리한 체형이다.
그리고 혈액형은 b형으로 추정된다.

이형호군 유괴 살해 사건


1991.01.29.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 현대아파트 놀이터.
이형호군의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44일이 지난 3월 13일 잠실대교 부근에 있는 한강고수부지의 배수로(일명 '토끼굴')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 발견당시 이형호군의 양손발은 스카프와 나일론 끈으로 묶여 있었는데, 사인은 코와 입을 막은 테이프로 인해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부검결과 위장에서 나온 음식물은 유괴 당일 친구집에서 먹은 점심으로 판명되어 유괴 직후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괴범은 44일 동안 이형호군의 부모에게 전화를 약 60차례정도 걸어 몸값을 수차례 요구하였다. 몸값을 받기위해 지시한 10차례의 메모와 통장개설신청서 등에서도 지문이 남기지 않을 정도로 범인은 매우 지능적이였다.


1991.02.20. 은행창구 직원에게 목격된 뒤로 지금까지 모습을 들어내지 않은 범인, 동원된 경찰 병력은 10만여명. 검거 및 수사된 용의자는 420여명. 87건의 협박음성과 필적의 감정. 하지만 공소시효 15년이 지나 2006.01.29. 영구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아래는 범인의 주요특징과 필적 및 인상창의이다.


범인의 주요특징


목소리 분석으로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을 지닌 남성.

도킹, 디케팅등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던 전문용어를 정확한 발음으로 사용함.

고학력자로 추정

체격은 168~170. 보통체격. 희고 작은 얼굴형에 눈두덩이가 두꺼운 편.

서울이나 경기도 지역의 말씨를 사용

범인의 필적과 몽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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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초등학생 실종사건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1991.03.26. 대구 달서구 와룡산.
당시 성서국민초등학교에 다니던 9~13세의 소년 5명. 도룡뇽알을 주우루 간다며 나간 아이들이 그때를 마지막으로 발견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실종 어린이들을 개구리소년으로 불렸는데, 사실은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을 개구리 잡으러 간다는 것으로 와전된 채로 초기에 퍼진 것으로 비롯된 일이다.)


1991.03.26.은 5·16 군사정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만에 부활하여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시·군·구의회 의원 선거일 날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사건발생 2년 후인 1993년에는 kbs 1tv의 사건25시,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심층적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당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병력은 약 50만명. 하지만 잘못된 제보와 소문으로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1993년에는 부모들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으나, 1996년에 수사본부장이 대구경찰청 청장에서 살서경찰서장으로 바뀌고, 각 경찰서에 차출된 수사요원들도 복귀하였다.


11년동안 국내 단일사건으로 최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한 이 사건은 1991년 325건, 1992년 97건, 1993년 131건등의 제보가 접수되었지만 대다수가 허위였다.


그러던 어느날 2002년 9월 26일. 대구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쪽의 와룡산 중턱에서 유골 4구와 신발 5켤레가 발견되었다. 이 유골을 감정한 경북대학교 법의학팀은 개구리소년의 유골이라 판명하였으며, 타살로 결론을 내렸다.


이 유골을 발견된 이유 또한 한 전화 제보였다. 발견되기 하루 전인 2002년 9월 25일 서울의 한 일간지사로 "와룡산에 개구리 소년이 묻혀있다. 그곳에 가면 큰 무덤이 있다."라는 제보전화가 온 것이다. 2004년 3월 26일. 경북대학교 병원 영안실에서 합동 장례식을 치렀고, 2006년 3월 공소시효 만료되어영구미제사건으로 남겨졌다.


아래는 범인의 몽타주와 실종된 아이들 이름과 당시 나이이다.


실종된 아이와 당시 나이

김영규(11세)

김종식(9세)

박찬인(10세)

우철원(13세)

조호연(12세)

범인의 몽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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