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시 나치 독일은 신생아를 포함한 어린 아이들의 피를 뽑아내 친위대인 SS와 고급 장교들의 수혈에 사용했다
아동 수용소인 라트비아의 살라스필스
약 3년간 존재했던 이곳은 나치의 모든 수용소들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행위가 벌어진 곳이다
유명한 아우슈비츠가 '죽음의 수용소'로 유명하다면 살라스필스는 나치 장교들을 위한 '혈액 은행'으로 알려졌다
5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닭장 같은 곳에 모아놓고 죽을 때까지 피를 뽑아냈고 일부는 생체 실험에 이용되었다고 한다.
살라스필스 수용소는 1941년 나치가 라트비아를 점령한 후 유태인 수형자들을 동원하여 만들어졌다
나치의 공식 명칭은 카이저발트로 친위대인 SS의 특수작전집단 아인자츠그루펜의 서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2만명 이상의 리가의 게토 출신 유태인들을 동원하여 수용소가 건설되었고 겨울이 지나면 소련 서부 출신의 유태인들을 수용할 계획'임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에서 SS의 옐켈른 상급집단지도자가 증언한 내용은
'매주 2-3천명의 유태인이 살라스필스에 수송열차편으로 도착하였고 우리는 약 8만7천여명을 사살 처분하였다'
하지만 1942년 중반 부터 살라스필스에는 소련군 포로 및 집시, 유태인들이 섞여서 수감되기 시작했고
이들은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총살을 당한다
1942년 중반 이후 살라스필스에는 백러시아와 러시아의 북서부 지역인 프스코프, 칼리닌스크, 레닌그라드 주 출신의 슬라브인 어린 아이들이 수용되기 시작한다
'노동 교화소'라고 간판을 내걸은 이곳에 2-3세 아이들과 심지어는 태어난지 몇 주 되지 않은 유아들까지 수용된다
이들 모두는 발목에 생년월일과 수감번호가 적힌 표를 달고 있었고 이름따윈 아예 없었다
어린 아이들은 팔에 주사바늘이 꽂힌 채 혈액을 채취 당했고
도중에 정신을 잃으면 혈액 채취를 중단하였으나 많은 아이들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과출혈로 사망한다
사망한 아이는 바로 화장되거나 집단으로 매장되었다
살라스필스에 수용되었던 아이들의 숫자는 12,000 여명이며 이들 중 7,000 명 이상이 이곳에서 사망한다
나치의 패전이 다가오자 친위대는 블로벨 대령의 지휘하에 관련 서류들을 소각하며 흔적을 지우기 시작하였고
수형 유태인들을 동원하여 집단 매장된 어린 아이들의 사체와 유골들을 소각 처분한다
이후 살라스필스에 진주한 소련군은 8세 이하 아이들의 사체 632구를 발굴하였고 그 중 114구는 젖먹이 유아, 106구는 3세 이하로 판단하였다
수용소가 위치했던 라트비아 정부는 나치 부역의 혐의 및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라스필스 수용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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